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서브비주얼

산자수명한 천혜자원 아름다운 설악면!

마을의 역사/유래

  • 설악면연혁
    설악면은 그 연조가 매우 깊다. 멀리 백제시대에는 거사참 ( 去斯緻 ), 항양 ( 恒陽 ), 양근 ( 楊根 ) 군에 속해 있던 미원장 ( 迷源莊 ) 이었다. 757 년 신라 경덕왕 16 년에는 빈양 ( 濱陽 ) 군에 속해 있었고 ,94O 년인 고려 태조 23 년에는 양근군에 예속되었으며 , 그후 광주부 ( 廣州府 ) 에 편입되었다가 1175 년 양근현에 감무가 부임하여 편입되고 , 고려고종 44 년인 1257 년 영학 ( 永化 ) 현의 감무를 받고 , 1267 년 위사공신 ( 衛社功臣 ) 김자정 ( 金自廷 ) 의 고향이라는 덕으로 익화현 ( 益化縣 ) 으로 승격되어 현감이 부임하니 미원장은 익화현 북면이었다. 1356 년 ( 공민왕 5) 국사승 ( 國師僧 ), 보우 ( 普愚 ) 의 세거지 ( 世居地 , 出生地 ) 라 하여 익화현은 양근군 ( 楊根郡 ) 으로 승격되고 , 미원장은 미원현 ( 迷源縣 ) 으로 격상되었으나 , 미원현은 인구가 희소하고 교통이 불편하여 현이면서도 양근군 감무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.
    1658 넌 ( 孝宗 9) 에는 양근군과 더불어 지평군 ( 砥平郡 ) 에 예속되었다가 1668 년 ( 顯宗 9) 양근군에 감무를 받고 ,1728 년 ( 英祖 4) 양근군이 현으로 강등되고 미원현은 상북?하북면으로 갈려 예속되었다. 1741 년 양근군으로 다시 승격되고 미원현은 상도면 하도면으로 개칭하다. 1747 년 ( 英祖 23) 군을 갈산 ( 葛山 일명 乾芝山 ) 으로 옮기고 , 군수가 부임하여 미원은 상도?하도 그대로 두다. 그후로도 1785 년 ( 正祖 9) 에 강등되었던 현이 다시 군으로 승격되는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미원현은 상도?하도로 있었고 , 계속하여 속현으로 예속되었다. 이때의 관할은 여주진 ( 驪州鎭 ) 이었다. 1895 년 관재개혁에 의하여 양근군 설악면으로 개명되고 ,1942 년 행정개편에 의하여 설악면은 가평군 으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. 1973 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일부가 설악면 으로 편입되어 이천리가 되었다.
    설악면연혁
    1356 년 공민왕 5 년 당시 국사승인 보우스님이 수년간 우거한 고을이라하여 현으로 승격되어 미원현으로 불렸으나 면적과 인구가 적어 양근군 북면에 편입
    1896 년 관제개혁으로 양근군과 지평군이 통폐합되어 양평군으로 개편되면서 양평군 상하도면으로 분리
    1942 년 청평수력발전소가 준공되면서 양평군에서 분리하여 가평군으로 편입
    1973 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일부가 설악면으로 편입 되어 이천리가 됨
  • 신천리
    본래 미원현이 있었으므로 미원 ( 美元 ) 또는 현동이라 불리웠는데 , 고려말기에 양평군에 편입되고 조선조때 북면 ( 북하도면 ) 이 되었다가 1914 년 행정구역 폐합때 사근천리 , 신촌리 , 한거리 , 명자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신촌과 사근천의 이름을 따서 신천이라고 부름.
  • 선촌리
    1914 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울업리와 탐산 , 탐선리 , 석촌리명압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그중의 탐선리와 석촌리의 이름을 따서 선촌리라고 하여 설악면에 편입함 또한 신선이 놀던 자리가 울업산 신선봉 에 있다하여 선촌리로 부른다고 하며 지금도 신선이 놀았던 자리로 추축되는 구덩이가 파헤쳐진 곳이 있다.
  • 회곡리
    본래 양평군 북하도면의 지역으로 회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라 하여 “회골”또는 “회곡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. 1914 년 행정구역폐합때 “회곡리”로 명칭이 정해져 현재에 이르고 있음.
  • 사룡리
    본래 양평군 북하도면의 지역인데 1914 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사점리 , 용문천리 , 소사리를 합하여 사점과 용문천의 이름을 다서 사룡리가 됨.
  • 송산리
    본래 양평군 북하도면의 지역으로 , 청평댐을 건설하기 전에는 땟목이나 배를 이용하여 서울이나 춘천으로 오고 갔는데 강원도에서 서울로 왕래하는 배사람들이 주로 지금의 송산리를 중간숙소로 이용하게 되면서 많은 주막들이 생겨나고 과객들이 노독을 풀기위하여 술을 마시고 노래 ( 소리 ) 를 하였다고 하며 , 그후부터 “소리”라 칭하다가 “송산리”가 되었다고 하며 또한 소나무가 이곳에 많이 있다고 하여 “솔이”또는 “송산리”라고 불렀다고도 함.
  • 미사리
    본래 양평군 북하도면의 지역으로 , 미륵불이 있어서 “미사” 또는 “메수내”라 하였는데 1914 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운담을 병합하여 미사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.
  • 위곡리
    옛날 선비들이 많이 살았다하여 위육 ( 位育 ) 이라고 하였으나 1914 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위육 (3 리 ), 위곡?도곡 (1 리 ), 창리 (2 리 ) 를 병합하여 위곡리라 하였다.
  • 창의리
    본래 삼의리 , 독산리 , 도리 , 창리가 있었던 마을인데 1914 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이들 마을이 병합하여 창리와 삼의리의 이름을 따서 창리라고 했다.
  • 엄소리
    본래 양평군 북상도면의 지역으로 무당이 빠져 죽었다는 “무당소” 또는 “엄소”라 하였는데 1914 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천안리 일부를 병합하여 현재의 엄소리가 되었다.
  • 설곡리
    본래 양평군 북상도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 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소설리와 설곡 , 음방 , 양방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이들중 소설과 성곡의 이름을 따서 설곡리라 하였고 일설로는 소설리와 성내에 유독 눈이 많이내려 설곡이라 하였다고 함.
  • 묵안리
    묵안리는 동네어귀에 검은바위가 있어 “먹바위” 또는 “묵인” “먹인”이라 부르다가 묵안리가 되었다.
  • 가일리
    마을한복판에 아가위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어느 나그네가 그 정자밑에서 쉬어가면서 가정 ( 嘉亭 ) 이라고 부를만하다고 한후 “가정”으로 써오다가 지금은 가정 ( 可亭 ) 으로 쉬운 글자로 바뀌어 쓰게되고 , 지명도 가정이 있는 동네라고 하여 가정리로 됨. 또한 윗가정 동남쪽에 대일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대일이란 숨어살기에 좋은 외딴곳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옛날 검사가 나면 큰 동네라고 하였는데 이마을에서 이 ( 李 ) 검사가 나와 대일이라고 불려졌다는 설도 있다.
  • 방일리
    옛날부터 밤이 많이 나는곳이라하여 “밤자골”이라고 하다가 “밤일” 또는 “방일”로 되었다. 1914 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생방리 , 음방리 , 양방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“방일리”라 해서 가평군 설악면에 편입함.
  • 천안리
    본래 양평군 북상면으로 1914 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불기리 ( 또는 부지리 ), 천현리 일부를 병합해서 천현과 안성골의 이름을 따 천안리라 부르게 되었다.
  • 이천리
    본래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의 일부였으나 1973 년 7 월 1 일 대통령 제 6542 호에 의하여 노문리의 일부였던 영천 , 배치 왕배지역을 가평군 설악면으로 편입하고 , 배치의 배이 ( 梨 ) 자와 영천의 천 ( 泉 ) 자를 합하여 이천리라 명명한것임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