화담당경화탑

- 명칭
- : 화담당경화탑
- 소재지
- : 조종면 하판리
- 관리기관
- : 현등사주지 (031-585-0707)
- 지정번호
- : 향토유적 제 1 호
- 지정일
- : 1986 년 5 월 2 일
이 탑은 조선후기의 현등사 승려 화담당 박경화 (1786-1848) 스님의 부도탑이다 . 부도의 기단석 앞면에는 화담당 경화탑이란 명문이 음각되어 있으며 이탑의 건립연대는 " 무신 10 월입 " 이란 음각으로 미루어 조선 제 24 대 헌종 14 년 (1848)10 월임을 알 수 있다 . 이 부도탑의 주인공 화담당은 순조 3 년 (1803) 화양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고 지탁대사의 불법을 이어 받았다 . 화담당 스님은 말년에 현등사에 들어와 불법을 강론하고 수도에 전념하다가 현종 4 년 (1848) 에 입적했다 .
가평향교

- 명칭
- : 가평향교
- 소재지
- : 가평읍 읍내리
- 관리기관
- : 가평군청 (031-580-2068)
- 지정번호
- : 향토유적 제 2 호
- 지정일
- : 1986 년 6 월 2 일
가평향교는 1398 년 ( 태조 7 년 ) 세워졌으며 현재의 건물로는 대성전 , 서무 , 내삼문 , 제실 , 명륜당이 있어 전통 향교의 원형을 갖추고 있다 . 병자호란 당시 1636 년 ( 인조 14 년 ) 에 대성전 일부가 파손되어 개축하였고 , 1950 년 한국전쟁 때 대성전이 불 타 휴전 후 새로 지었다 . 그러나 이 건물도 낡아 1980 년 가평군 유림들의 성금과 예산으로 대성전 , 서무 , 내삼문을 중건하고 재실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. 향교의 배치는 문묘를 앞쪽에 두고 학교를 그 뒤에 배치하는 ' 전묘후학 ' 형식과 학교를 앞에 두고 뒤쪽에 문묘를 ' 전학후묘 ' 두 가지 형식이 있는데 , 가평향교의 경우 뒤에 가평초등학교가 있어 ' 전묘후학 ' 에 해당한다 . 대성전 내부에 공자를 비롯한 다섯분의 성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동쪽벽으로는 송준길 등 열 분의 현인의 위패를 서쪽에는 주희를 비롯한 열 분의 현인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.
경현단

- 명칭
- : 경현단
- 소재지
- : 설악면 선촌리
- 관리기관
- : 가평군청 (031-580-2068)
- 지정번호
- : 향토유적 제 3 호
- 지정일
- : 1986 년 5 월 2 일
경현단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로서 이름 높았던 조광조 를 비롯한 12 유현을 모신 제단이다 . 본래 이곳은 조선 현종 2 년 (1661) 에 창건된 미원서원이 있던 자리이다 . 그러나 고종 8 년 (1871)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철폐되었고 그 뒤 지방 유림들의 주선으로 그 자리에 단을 설치하고 돌로 만든 신주를 12 개 세워 놓았다 . 이 신주들은 70 여㎝의 높이의 제 1 기단과 그 위에 높이 30 ㎝정도인 제 2 기단을 쌓아 단을 만들었다 . 배향된 유현들은 조광조 , 김식 , 남경언 , 김육 , 김창흡 , 이제신 , 박세호 , 이원충 , 남도진 , 이항로 , 김평묵 , 유중교 선생이시다 .
현등사

- 명칭
- : 현등사
- 소재지
- : 조종면 하판리
- 관리기관
- : 현등사주지 (031-585-0707)
- 지정번호
- : 향토유적 제 4 호
- 지정일
- : 1986 년 6 월 2 일
신라 제 23 대 법흥왕 ( 재위 514-539) 때 인도에서온 마라아미 스님을 위하여 창건한 것이라 한다 . 그후 수백년동안 폐허로 버려져 오다가 고려 제 21 대 희종 ( 재위 1204-1211) 때 보조국사 지눌이 운악산 중턱에서 불빛이 있어 이를 이상하게 여겨 와보니 절터의 석등에서 불이 밝혀져 있음을 보고 새로이 절을 지어 현등사라 했다고 한다 . 그 뒤 조선 태종 11 년 4 월 함허대사가 중수했고 순조 29 년 (1829) 화재를 맞아 건물이 전소된 것을 이듬 해 최윤 , 원빈 스님이 보광전 , 극락전 , 요사체 등 건물을 중수 , 1984 년 충현스님이 극락전 , 보광전 등을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. 현등사는 양주 봉선사의 말사이다 .
강영천효자문

- 명칭
- : 강영천효자문
- 소재지
- : 북면 적목리
- 관리기관
- : 가평군청 (031-580-2068)
- 지정번호
- : 향토유적 제 5호
- 지정일
- : 1986 년 6 월 19 일
효자 강영천 은 진주강씨로 3 세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연일정씨와 함께 살던 중 7 세 때 모친이 병으로 몸져 눕게 되었다 . 나이는 비록 어렸으나 효성이 지극하였던 영천은 병든 어머니의 수발을 들던 중 병이 악화되어 정신을 잃자 자신의 손가락을 문지방에 깨트려 피를 내어 입에 흘려놓고 쓰러지고 말았다 . 어머니가 깨어나 피를 흘리며 쓰러진 어린아들을 발견하여 정성껏 간호한 끝에 깨어날 수 있었다 . 정문앞에 걸린 " 효자업무강영천지문각 강희 319 년 경진 3 월 25 일입 " 이라 새겨진 현판으로 보아 이 효자문은 숙종 26 년 ( 1700 년 3 월 15 일 ) 에 건립 했음을 알 수 있다 . 본래의 건물은 290 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멸실된 것을 1987 년도에 복원한 것이다 .
중종대왕태봉

- 명칭
- : 중종대왕태봉
- 소재지
- : 가평읍 상색리
- 관리기관
- : 가평군청 (031-580-2068)
- 지정번호
- : 향토유적 제 6호
- 지정일
- : 1986 년 6 월 19 일
중종대왕태봉 ( 中宗大王胎封 ) 은조선조 11 대 임금인 중종 (1506~1544) 의 태 ( 胎 ) 를 모신 곳으로 조선시대 태봉의 구조를 학습할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 . 이 태봉 이 발견된 경위는 , 1982 년 12 월 산주인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작업을 하던 중 태 ( 胎 ) 를 봉안했던 돌항아리로 지름 100cm, 높이 120cm 인 태항아리가 출토됨으로써 이곳이 태봉이었음을 알게되었다 . 부근에는 파손된 거북비석을 비롯하여 난간석 등이 흩어져 있었는데 , 이는 일제침략기 일본인들의 도굴로 인하여 파손되고 방치되었던 것이다 . 출토 뒤에 한동안 상색초등학교로 옮겨 전시·보관하였다가 1986 년 향토유적으로 지정되면서 1987 년 오늘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. 태봉은 중앙에 태실비를 보수하여 세웠는데 머리가 없어진 거북돌과 가운데를 보수하여 이어 붙인 빗몸돌 , 새 ( 新 ) 돌로 만들어 덧붙인 받침돌로 구성되어 있다 . 『신증동국여지승람』 11 권 가평현조 ( 加平縣條 ) 에 의하면 1507 년 ( 중종 2 년 ) 에 중종의 어태 ( 御胎 ) 를 안치하고 나서 가평현을 가평군으로 승격시켰다고 하였으니 1492 년 ( 성종 23 년 ) 에 어느 곳인가에 태를 봉안했던 것을 1507 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봉안하고 새로 임금의 품격에 맞게 태실을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.
잠곡서원지

- 명칭
- : 잠곡서원지
- 소재지
- : 가평읍 상색리
- 관리기관
- : 가평군청 (031-580-2068)
- 지정번호
- : 향토유적 제 7호
- 지정일
- : 1986 년 6 월 19 일
잠곡서원은 잠곡 김육선생 (1580~1658) 의 학덕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1705 년 ( 숙종 31 년 ) 에 창건되었고 , 1707 년에 사액되었다 . 이곳은 김육선생이 광해군의 학정에 불만을 품고 34 세에서 44 세까지 10 년간 은거하면서 후학을 키우던 곳이었다 . 원래 호가 회정당이었는데 이곳에 와서 잠곡이라 고쳤다 . 선생은 이곳에서 농사지으며 나무와 숯을 서울로 져 날라 생계를 이었다 한다 . 1704 년 가평의 사대부들이 선생이 몸소 농사지은 곳에 선생의 유덕을 기리고자 잠곡서원을 세웠다 . 그 후 서원으로 이어지다가 잠곡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. 잠곡천에는 김육이 독서를 하고 부인이 물레질을 했다고 전해오는 바위가 있다 . 서원지는 가로 15m, 세로 12m 크기로 울타리를 둘러 보호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가운데에 신위를 두고 , 오른쪽에는 비석을 , 왼쪽에는 기념비를 세워 놓았다 . 원래의 자리를 잃은 주춧돌 6 개가 양쪽 울타리 밑에 놓여 있다 .
열부나주정씨정려각

- 명칭
- : 열부나주정씨정려각
- 소재지
- : 가평읍 복장리
- 관리기관
- : 가평군청 (031-580-2068)
- 지정번호
- : 향토유적 제 8 호
- 지정일
- : 1986 년 6 월 17 일
열부 나주정씨 정려각은 4 각의 기둥에다 기와지붕을 하고 있으며 그 안에 사액원각 ( 烈婦 學生 曺元承妻 羅州丁氏之門 上之卽祚 二十九年 辛酉十月 日命旌 < 열부 학생 조원승처 나주정씨지문 상지즉조 이십구년 신유십월 일명정 >) 을 보관하고 있다 . 열부 나주정씨는 가평군 북면 화악리 배나무골에서 부친 정선교의 둘째딸로 태어나 17 세 때에 창녕조씨 원승에게 출가하였으나 남편이 병을 얻어 눕게되었다 . 밤 마다 정한수를 떠놓고 천지신명께 지성을 드리고 백방으로 약을구해 간병했으나 부인의 눈물겨운 간병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1880 년 경인 6 월 28 일 52 세로 별세하였다 . 당시 선비 집안의 장례풍속은 90 일장이다 . 열부정씨는 3 개월을 하루같이 식음을 전폐하고 빈소를 지키다가 남편의 장례 하루 전인 같은해 9 월 27 일 34 세의 젊은나이로 순절하였다 . 이와같은 애틋한 정절의 사연이 조정까지 전해져 1891 년 시월에 열부정문을 하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.
장원한정려각

- 명칭
- : 장원한정려각
- 소재지
- :가평읍 금대리
- 관리기관
- : 가평군청 (031-580-2068)
- 지정번호
- : 향토유적 제 9 호
- 지정일
- : 1986 년 6 월 17 일
장원한 정려각은 1942 년 청평발전소 설치로 인하여 멸실되었다가 1997 년도에 지금 장소에 복원하여 4 각의 기둥에 기와지붕을 얹었으며 그 안에 정문명 판각 ( 孝子嘉善 大夫同知 中樞府事 張遠翰之門 哲宗癸亥 五月 日命旌 < 효자가선 대부동지 중추부사 장원한지문 철종계해 오월 일명정 >) 이 있다 . 장원한이 열두 살 때 아버지 병환이 위독하여 대신 죽기를 기원 , 밤낮으로 통곡하고 변을 맛보아 달고 씀에따라 병세를 살폈다 . 상을 당해서는 3 년간 상복을 벗지않고 3 년간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매일같이 호읍 ( 號泣 ) 하였다 . 그 후 장씨 가문에는 여덟 효자가 태어났다 .
별묘

- 명칭
- : 별묘
- 소재지
- : 설악면 방일리
- 관리기관
- : 가평군청 (031-580-2068)
- 지정번호
- : 향토유적 제 10 호
- 지정일
- : 1986 년 6 월 17 일
별묘는 남도진 (1674 현종 15 ∼ 1753 영조 11) 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설악면 방일리 음방 ( 陰坊 ) 에 있다 . 이사당에 모셔진 영정은 가로 120 ㎝ , 세로 200 ㎝ 크기의 두루마리 표구로 제작되었는데 1728 년 ( 영조 5 년 ) 6 월에 조선 숙종조 시절에 이름이 알렸던 화가 함세휘가 그린 것으로 인물에 대한 선의 감각이 원형대로 잘 보존 되어있다 . 이 영정은 그 후 후손들에 의하여 보관되어 오다가 그의 6 대손이자 구한말 학자이며 정치가 , 외교관으로 이름이 높던 예조판서 남연철 (1840-1926 년 ) 이 1888 년 2 월 7 일 이곳에 사당을 지어 모시며 매년 칠월칠일 제향을 드려 오다가 1985 년 봄에 그 후손들에 의하여 다시 전통가옥으로 부연을 달아 중건한 것이다 . 이 영정은 남도진 이 쓴 명문과 그의 친구 박창언 이 그 아름다움을 예서로 찬미한 글이 있고 조종주가 찬미한 글과 함세휘가 戊申六月下院 ( 무신유월하원 ) 에 그렸다는 표시가 있다 .
연안이씨삼세비각

- 명칭
- : 연안이씨삼세비각
- 소재지
- : 상면 태봉리
- 관리기관
- : 가평군청 (031-580-2068)
- 지정번호
- : 향토유적 제 11 호
- 지정일
- : 1988 년 6 월 17 일
연안이씨 삼세비각은 이 정구 , 이 명한 , 이 일상 ( 삼대 대제학 ) 의 신도비이다 . 이 정구의 자는 성징이고 월사는 그의 호이며 , 본관은 연안이다 . 그는 15 세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선조 23 년 (1590) 에 27 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, 임진왜란때에는 명과의 대외관계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국가적 난국을 타개하는데에 큰 공을 세워 이후 호조판서 , 예조판서 , 좌의정 , 우의정을 거치면서 순탄한 관료생활로 일생을 마쳤다 .이명한의 자는 천장이고 , 호는 백연으로 선조 29 년인 서기 1595 년에 월사 이 정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. 22 세에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정자와 전적을 거쳐 대사헌 , 대제학 , 이조판서 , 예조판서등을 역임하였다 . 그는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. 인조 23 년인 서기 1645 년에 향년 51 세에 영면 하였고 시호는 문정이며 , 묘는 상면 태봉리 월사의 묘 위에 있다 . 이일상 의 자는 함경 , 호는 청호로 1612 년 7 얼 28 일 월사 이정구 의 손자이자 이조판서 이명한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나 신동이라 하였으며 , 17 세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고 있다가 22 세되던 해에 설서가 되면서부터 사관의 길로 들어섰다 . 효종으로 하여금 북벌계획을 수립토록 하는데 크게 기여 하였고 , 1660 년 현종이 임금에 오른뒤부터 대제학 , 우참찬 , 한성부판윤 , 지의금부사 , 춘추관사 , 호조판서등 주요 요직을 거치다가 예조판서로 있을 때 향년 55 세에 이르러 별세한 뒤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.
삼충단

- 명칭
- : 삼충단
- 소재지
- : 조종면 하판리
- 관리기관
- : 가평군청 (031-580-2068)
- 지정번호
- : 향토유적 제 12 호
- 지정일
- : 1998 년 6 월 17 일
삼충단은 조병세 , 민영환 , 최익현 세 분 충신의 충절을 기리는 제단이다 . 서기 1905 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여 국권을 침탈하는 만행을 자행하자 , 당시 조병세 선생은 의정대신 ( 議政大臣 ) 으로 있다가 가평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을사 오적을 처단하고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며 항거하였으나 왜헌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결고국중사민서 ( 訣告國中士民書 ) 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. 최익현 선생은 의병을 봉기하여 왜구토벌에 앞장서 싸우다가 체포되어 대마도에서 단식항거중 순국하였으며 , 민영환 선생은 시종무관 ( 侍從武官 ) 이었는데 대한문앞에 나가 석고대죄 ( 席藁待罪 ) 하며 국권회복의 상소를 올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국민과 각국공사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충신이다 . 이 삼충단은 일제치하이던 1910 년에 설단되었으며 1989 년에 복원되었으며 매년 11 월 25 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.
북면적목리신앙유적지

- 명칭
- : 북면적목리신앙유적지
- 소재지
- : 북면 적목리
- 관리기관
- : 가평군청 (031-580-2068)
- 지정번호
- : 향토유적 제 13 호
- 지정일
- : 1999 년 12 월 31 일
적목리신앙유적지는 가평군청에서 북쪽으로 약 35km 지점인 가평천 상류 북면 적목리 산 1-28 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.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전국 각지에서 징용을 피해 모여든 사람들이 목탄생산 , 경춘철도에 필요한 침목조달과 벌목작업등을 하며 광복이후까지 산기슭 곳곳에 반 지하식 움집을 짓고 공동생활을 하면서 숯 생산과 벌목 등을 하여 왔던 곳이며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이 일제의 신사참배 , 창씨개명 , 종교탄압과 강제징용을 피해 은신하며 신앙심을 지켜온 곳이다 . 50cm 높이로 쌓아올린 돌담 20 여평 규모의 교회터 흔적이 남아 있으며 , 바로 옆에 지름 170cm 의 타원형 돌담의 관솔불터가 있는데 이는 송진을 태워 성경연구와 집단기도회를 개최하던 곳이다 . 이 유적의 가장 안쪽 ( 산 정성 방향 ) 에 있는 성경은닉처가 있고 , 이곳에 성경과 종교서적을 감추어 두고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. 이 외에도 가옥터와 공동막사 , 망을 보던 장대의 흔적들이 남아 있기도 하다 .